마지막 살아남은 사람, 그녀는 김진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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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살아남은 사람, 그녀는 김진숙입니다
[기고] 소금꽃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송경동(시인) 2011.03.30 10:37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벌써 3개월여 전이지만 난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함부로 쓰기엔 너무도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십여일 전부터는 매일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런 중간에도 나는 다시 네 편의 추도시를 쓰고 읽어야 했다. 쌍용차 무급자인 임무창 씨의 추도시였고, 23년 전에 신흥정밀에서 분신해 간 박영진에 대한 추도시였다. 삼성전자에서 죽어간 반도체노동자 황유미와 마흔 여섯 분에 대한 추도시였고, 며칠 전 다시 쌍용자동차 노동자 열 네 분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였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추도시를 읽어가던 도중 나는 참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안으로 전이되어 와 내 대신 시를 읽으며 울고 있는 거였다. 난 이상한 전율에 휩싸인 채 그 이를 대신해 울부짖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이야기는 1975년 이후 부산에 있는 한 조선소(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떤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 조선소에서 일해 왔던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이것은 우리 시대 어떤 난장이들의 서럽디 서러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며, 당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이들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섯인데, 안타깝게도 넷은 죽고,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는 지금 그중 한 명이 올라가 목을 맸던 가파른 크레인 위에 올라 있다. 오늘로 81일째다. 며칠 전 추도시를 읽을 때 내 안에서, 나 대신 함부로 내 글을 뺏어 읽던 이. 김진숙이다.
문상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던 공장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 『소금꽃나무』 중에서
용접슬러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용접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치덕치 부쳐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마냥 뒹굴며 살아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용접을 하고, 절단을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조합비를 횡령해 먹기 위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나아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이 절망의 조선소에 김진숙은 최초의 여성용접공으로 1982년 스물 한 살 때 입사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 나와 타이밍을 먹으며 옷감을 깁던 미싱공 생활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떨어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디뎌야 바퀴 밑에 깔려 죽지 않는다는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양하리라 믿기도 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스물한살 김진숙의 삶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쉰 두 살’의 머리 희끗한 해고 여성노동자가 되었다.
빼앗긴 박창수의 죽음
또 다른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박창수는 김진숙과 입사 동기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태백공고 3학년 실습기간이었던 1982년 2월에 대한조선공사 훈련소(현, 한진중공업 직업훈련소) 28기로 입소해 6개월 수료기간을 거쳐 8월에 한진중공업 선각공사부에 입사했다.
세월이 흘러 1986년 어느 날, 박창수는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에게 짓밟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얼마 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당한 김진숙이었다. 박창수 마음 한켠에서도 분노의 압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민주노조’라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밖에서 김진숙 등이 ‘조공노동자신문’을 만들면, 박창수는 이를 몰래 공장으로 들여와 뿌렸다.
1987년 6월 항쟁이 열리던 시기, 이들은 그해 7월 25일 공장에서 처음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간 아무 소리 못하고 받아먹던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수천의 소금꽃나무들이 일제히 집어 던지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들이 87년 6월 항쟁을 이어, 진정한 한국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87-88노동자대투쟁의 주역들이었다.
박창수는 이런 시대적 소명을 에둘러가지 않았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전노협 부산노련 부의장과,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 공동대표로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 그는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후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다. 5월 6일 새벽, 그는 찾아 온 정보기관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가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당시 경찰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올라 온 조선소 노동자들과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이 지키고 있던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마저 뺏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 추락사’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짓밟히고 끌려가는 63일간의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해 6월 20일,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김진숙은 그를 가슴에 묻었다. 이렇게 한 명의 친구가 갔다.
우리 시대의 의인, 김주익
이 소설의 슬픈 두 번째 주인공은 김주익이다. 박창수가 잡혀가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도 참석했던 이다. 다행이 그는 당시 구속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김주익은 박창수의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경찰과 사측의 사주로 움직이는 어용들로부터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생을 바쳤다.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이 되었지만,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년간의 활동 끝에 그가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러자 다시 정권과 한진중공업 사측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600여명이 잘려 나갔다.
김주익은 선택의 폭이 없었다. 당시 21년 동안 근무해서 그가 받는 월급은 기본급 108만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떼고 나면 팔십 몇만 원이었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명에 대해 18억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 고발하고,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천억 매출에 23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억에서 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었다.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준엽이와 혜민이와 준하, 그렇게 2남 1녀의 자녀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평소 책을 무척이나 좋아해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던 이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던 자상한 아빠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줄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다른 얘들은 아빠자랑도 하는데.. 내가 빨리 일자리 찼아줄께요! 파이팅!”이라고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는 이렇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과,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약속 사이에서 두 번째 약속을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 남긴 짧은 유서의 끝 구절이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그는 지키고야 말았다.
눈물의 장례식, 곽재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아픈 주인공은 또 한 명의 늙은 노동자 곽재규다.
죽어서도 크레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김주익을 마침내 평지로 내려오게 한 것은 박창수와 김주익보다 훨씬 먼저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였다. 그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일명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미안해,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를 아침마다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누구들처럼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곽재규는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주었던 마음 따뜻한 선배였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는 배움에 대한 한이 깊어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부지런한 노동자였다. 용접이면 용접, 엔진조립이면 조립, 조선소 업무 전체를 꿰뚫고 있었던 유능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주익이 목숨을 끊고도 85호 크레인을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한 많은 생을 내던졌다. 죽어서도 크레인을 못 내려오는 바보 같은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한 눈물겨운 투신이었다.
2003년 11월 16일. 마침내 김주익과 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눈을 뜨고는 볼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통곡의 장례식이었다.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시신이 내려왔고, 11미터 지하 도크에 있던 곽재규의 시신이 땅으로 올라왔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벌써 3개월여 전이지만 난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함부로 쓰기엔 너무도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십여일 전부터는 매일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런 중간에도 나는 다시 네 편의 추도시를 쓰고 읽어야 했다. 쌍용차 무급자인 임무창 씨의 추도시였고, 23년 전에 신흥정밀에서 분신해 간 박영진에 대한 추도시였다. 삼성전자에서 죽어간 반도체노동자 황유미와 마흔 여섯 분에 대한 추도시였고, 며칠 전 다시 쌍용자동차 노동자 열 네 분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였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추도시를 읽어가던 도중 나는 참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안으로 전이되어 와 내 대신 시를 읽으며 울고 있는 거였다. 난 이상한 전율에 휩싸인 채 그 이를 대신해 울부짖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이야기는 1975년 이후 부산에 있는 한 조선소(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떤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 조선소에서 일해 왔던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이것은 우리 시대 어떤 난장이들의 서럽디 서러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며, 당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이들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섯인데, 안타깝게도 넷은 죽고,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는 지금 그중 한 명이 올라가 목을 맸던 가파른 크레인 위에 올라 있다. 오늘로 81일째다. 며칠 전 추도시를 읽을 때 내 안에서, 나 대신 함부로 내 글을 뺏어 읽던 이. 김진숙이다.
문상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던 공장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 『소금꽃나무』 중에서
용접슬러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용접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치덕치 부쳐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마냥 뒹굴며 살아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용접을 하고, 절단을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조합비를 횡령해 먹기 위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나아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이 절망의 조선소에 김진숙은 최초의 여성용접공으로 1982년 스물 한 살 때 입사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 나와 타이밍을 먹으며 옷감을 깁던 미싱공 생활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떨어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디뎌야 바퀴 밑에 깔려 죽지 않는다는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양하리라 믿기도 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스물한살 김진숙의 삶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쉰 두 살’의 머리 희끗한 해고 여성노동자가 되었다.
빼앗긴 박창수의 죽음
또 다른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박창수는 김진숙과 입사 동기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태백공고 3학년 실습기간이었던 1982년 2월에 대한조선공사 훈련소(현, 한진중공업 직업훈련소) 28기로 입소해 6개월 수료기간을 거쳐 8월에 한진중공업 선각공사부에 입사했다.
세월이 흘러 1986년 어느 날, 박창수는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에게 짓밟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얼마 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당한 김진숙이었다. 박창수 마음 한켠에서도 분노의 압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민주노조’라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밖에서 김진숙 등이 ‘조공노동자신문’을 만들면, 박창수는 이를 몰래 공장으로 들여와 뿌렸다.
1987년 6월 항쟁이 열리던 시기, 이들은 그해 7월 25일 공장에서 처음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간 아무 소리 못하고 받아먹던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수천의 소금꽃나무들이 일제히 집어 던지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들이 87년 6월 항쟁을 이어, 진정한 한국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87-88노동자대투쟁의 주역들이었다.
박창수는 이런 시대적 소명을 에둘러가지 않았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전노협 부산노련 부의장과,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 공동대표로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 그는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후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다. 5월 6일 새벽, 그는 찾아 온 정보기관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가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당시 경찰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올라 온 조선소 노동자들과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이 지키고 있던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마저 뺏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 추락사’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짓밟히고 끌려가는 63일간의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해 6월 20일,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김진숙은 그를 가슴에 묻었다. 이렇게 한 명의 친구가 갔다.
우리 시대의 의인, 김주익
이 소설의 슬픈 두 번째 주인공은 김주익이다. 박창수가 잡혀가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도 참석했던 이다. 다행이 그는 당시 구속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김주익은 박창수의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경찰과 사측의 사주로 움직이는 어용들로부터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생을 바쳤다.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이 되었지만,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년간의 활동 끝에 그가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러자 다시 정권과 한진중공업 사측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600여명이 잘려 나갔다.
김주익은 선택의 폭이 없었다. 당시 21년 동안 근무해서 그가 받는 월급은 기본급 108만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떼고 나면 팔십 몇만 원이었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명에 대해 18억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 고발하고,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천억 매출에 23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억에서 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었다.
▲ 85호 크레인 위 故 김주익 지회장의 모습 [출처: 금속노조] |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준엽이와 혜민이와 준하, 그렇게 2남 1녀의 자녀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평소 책을 무척이나 좋아해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던 이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던 자상한 아빠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줄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다른 얘들은 아빠자랑도 하는데.. 내가 빨리 일자리 찼아줄께요! 파이팅!”이라고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는 이렇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과,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약속 사이에서 두 번째 약속을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 남긴 짧은 유서의 끝 구절이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그는 지키고야 말았다.
눈물의 장례식, 곽재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아픈 주인공은 또 한 명의 늙은 노동자 곽재규다.
죽어서도 크레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김주익을 마침내 평지로 내려오게 한 것은 박창수와 김주익보다 훨씬 먼저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였다. 그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일명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미안해,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를 아침마다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누구들처럼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곽재규는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주었던 마음 따뜻한 선배였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는 배움에 대한 한이 깊어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부지런한 노동자였다. 용접이면 용접, 엔진조립이면 조립, 조선소 업무 전체를 꿰뚫고 있었던 유능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주익이 목숨을 끊고도 85호 크레인을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한 많은 생을 내던졌다. 죽어서도 크레인을 못 내려오는 바보 같은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한 눈물겨운 투신이었다.
2003년 11월 16일. 마침내 김주익과 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눈을 뜨고는 볼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통곡의 장례식이었다.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시신이 내려왔고, 11미터 지하 도크에 있던 곽재규의 시신이 땅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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